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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rest , 50x50cm Acrylic colo




최수정 개인전에 부쳐


어릴 적 살던 집은 어린 우리가 온갖 꿈을 꾸기에 충분한 공간이었습니다.

기와집 깊은 부엌의 천장 자리에는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나무 계단을 몇 오르면 얼룩

한 꽃무늬의 제일제당 설탕통이 있어 동그란 스텐 뚜껑이 닳도록 몰래 여닫곤 했습니

다. 구석 자리에는 ‘엘레강스’ ‘어우야담’ 같은 책들도 널브러져 있었는데 우리는 읽기

보다는 인형 놀이에 써먹곤 했습니다. 

펌프질하던 샘가에 빨래판 대신 쓰던 돌판이며 우리 키만큼 높던 봉당, 기역 자 모양의 

아래채까지 어느 하나 허투른 데가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청마루 뒷문을 열면 보

이던 뒤뜰. 뜰이라기보다는 텃밭이 어울릴 정도로 할머니는 온갖 것들을 심어 놓으셨

습니다. 감나무가 있고 대추나무가 섰고 그 아래, 가지와 상추와 꽈리와 여름 배추와 

들깨와 이름 모를 풋것들……. 

앞마당은 엄마의 꽃밭이었습니다. 사과 향이 나던 덩굴장미(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장미 향이 생각나 종을 알기 위해 헤매었으나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얀 겹매

화, 채송화, 봉선화, 맨드라미.

봉당 위에 올라서면,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심은 미루나무 꼭대기가 옆집 지붕 너머로 

보였습니다. 학교만큼 나이를 먹은 플라타너스, 그 잎은 어찌나 컸던지 요즘도 가끔 두

려움의 원형으로 꿈에 등장합니다.

우리 가족은 그 다락방과 장미나무와 겹매화와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울던 햇빛살을 두

고 떠나왔습니다. 다시 돌아가지 못한 그 집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우리 가족의 

영혼 속에 봉인되었습니다. 유년의 영혼을 채워버린, 풀리지 않는 빗장을 푸느라 저는 

동화를 씁니다. 그 어떤 장르도 아닌 동화를 쓸 때 충족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수정이가 꽃과 나무과 풀과 숲을 그리는 이유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수정이의 다홍은 

엄마의 꽃잎을 닮았고 초록은 할머니의 푸성귀를 닮았습니다. 아니 닮지 않았습니다. 

열 살의 기억을 밟고 자신의 식물들을 자신의 채도로 새겼습니다. 나무 뒤에 칼끝을 숨

겨 온 시간을 짐작할 뿐입니다. 그게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주 아래 

가장 유사한 DNA를 소유한 우리라서 낮은 부엌 천장 자리, 다락방 구석에 놓여있던 

제일제당 설탕통을 떠올릴 뿐입니다.


최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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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12-1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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